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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delia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5-10-0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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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에는 게임 흰 늑대와 함께 정부 과제를 준비했다. 우리 규모에서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했고 현재 트렌드와 최신 기술을 모두 담으려 했다. 오랜만에 야근은 즐거움 그 자체였다. 전철이 끊기기 직전까지 일했고, 주말에도 사무실에 나갔다. 우리 둘이서 모든 분야를 다룰 수는 없다 보니 흰늑대의 지인들도 소집되었다. 정부 과제 문서를 준비하며 동시에 프로토 타입을 개발했다. 정부 과제의 최초 의도는 스타트 업이나 자금이 부족한 회사를 지원하려는 것이지만, 실적이 중요한 한국 사회에서는 수혜를 받은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완수되고 돈을 버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시스템 적으로 거의 다 완성된 버전을 제출해야 선정 가능성이 높았다. 이를 황당하게도 프로토 타입이라고 불렀다. 좋은 취지는 온데 간데 없었지만 그 것이 현실이었다. 흰 늑대와 함께 서너 번 지원했지만 모두 탈락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둘 다 이미 십 수번이나 정부 과제를 따낸 이력이 있었다. (생존형 개발자) 흰 늑대의 지인인 기관 관계자로부터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숨은 기준들이 생겼다고 했다. 정부 과제를 받아 제대로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않고 자기 배만 불리는 회사들을 걸러내기 위한 기준이었다. 첫 번째는 회사의 규모 문제였고, 두 번째는 이력이었다. 우리 회사의 업력은 10년이 게임 넘었지만 퍼블리싱이나 외주, CS 중심으로 운영되어 자체 개발 이력이 없었다. 결국 정부 과제는 당분간 포기하기로 했다.몇 달간 열심히 한 일이 의미가 없음을 알고 탈력감이 들었다. 그 시기에 마침 흥미로운 연락을 받았다. 당시 내가 연재 중이었던 웹소설을 통해 어떤 회사가 연락을 준 것이다. 왜지? 인기도 없는 작품인데? 연락을 받고 미팅하러 간 곳은 청계천이었다. 경찰을 피해 도망가던 바로 그 장소였기에 특별한 기분이 들었다. (촛불 하나) 미팅을 하게 된 프로젝트는 좀비런이었다. 이름 그대로 좀비를 피해 달리는 레크레이션이다.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지만, 20대 인싸나 참가하는 행사인 것 같아서 직접 가본 적은 없었다. 회사가 청계천이기 때문이었을까? 무언가를 피해 도망치던 순간의 기억이 연상되어 운명인가 싶었다. 그 놈의 운명 타령은 끝이 나질 않는다. 그 회사에서는 나를 웹 소설 작가로만 알고 있었다. 연락한 이유는 코로나로 인해 오프라인 행사가 힘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를 대처하기 위해 좀비런의 체험형 보드 게임을 개발한다며 시나리오 자문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 연재 중이던 웹 소설 중에 보드 게임 류를 소재로 한 작품이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미팅 과정에서 20년이 넘는 경력의 게임 기획자임을 밝혔고, 이 날을 계기로 많은 게임 프로젝트에서 자문을 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회사의 대표를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과감한 창업 후 계속 회사를 이어가고 있는데, 그 열정과 발상이 대단했다. 이 것이야 말로 게이미피케이션이 아닌가! 다행히 대표도 나를 좋게 생각했나보다. 이후 좀비런 부산에는 직접 현장에도 갔고 행사 내부 콘텐츠 기획에도 참여했다. 이 회사는 이제 좀비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다른 레크레이션 행사를 기획한다. 일을 하다가 막힐 때는 한 번씩 연락을 주고 찾아오는데, 그럴 때마다 반갑고 즐겁다. 돈은 되지 않더라도 흥미로운 일이니까.좀비런 행사에 참여해서 MBC 분장팀에게 좀비 분장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예전에 알던 대표님들을 통해서 연락이 온 건들이 있었다. 정부 과제를 받았지만 막상 게임은 개발할 줄 모르는 회사들의 의뢰였다. 그래. 이 것이 현실이겠지. 규모와 이력만을 중시하다 보니 개발 능력이 없는 회사들에게 수혜가 돌아간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과제 완수를 할 수 없어서 곤란했다. 누군가가 이를 정리해줄 필요가 있었다. 결국 정해진 비용과 기간 안에 일을 마무리해주는 조건으로 외주 디렉팅과 자문을 진행했다. 문제가 될만한 계약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내가 받는 대가는 정부 과제 비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쪽 비용은 철저하게 회계 상 보고를 하게 되어 게임 있으므로 건드릴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비용이 터무니없이 적을 수 밖에 없었다. 돈을 생각하면 할 필요가 없는 일들이다. 하지만 회사들은 절실했다. 정부 과제 실패로 지원금을 환수 당하게 되면 회사의 타격은 심각하다. 직접 환수 당해본 입장이라서 더욱 공감이 되었다. 고민 끝에 나름의 조건을 정했다. 게임이 출시된다면 내가 참여 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 적은 비용을 상쇄할 만한 충분한 명목이었다. 눈 앞의 돈을 쫓는 것보다 이력을 남기는 것이 나의 미래와도 연결이 되지 않을까?친구 토이의 주선으로 문화재와 역사 관련 작업을 몇 개 함께 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운 일은 보드 게임 제작이었다. 보드게임 지도사 자격증과 동인 보드 게임을 만든 이력 덕분이었다. 여러 번 프로토 타입을 제작했고, 플레이를 통해 규칙을 수정하거나 내용을 변경했다. 보드 게임 제작도 결국은 정해진 예산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다른 보드 게임 작가 분들과 달리 사업 효율에 맞춘 제작과 고증의 균형을 잡아야 했다. 그렇게 첫 번째 보드 게임이 출시되었는데, 시중에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 교구로 판매되는 방식이었다. 기대보다 성과가 좋다는 이야기가 들렸고, 이어서 또 다른 역사를 소재로 다른 보드게임 제작 의뢰가 들어왔다. 일정이 빠듯 하다 게임 보니 토이가 새벽에 집 앞으로 차를 가지고 오기도 했다. 24시 무인 카페에서 종이를 잘라서 만든 프로토 타입을 플레이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좋은 추억이 되었다. 두 번째 보드 게임의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아니, 좋을 수가 없었다. 요즘은 인식이 달라졌지만, 당시에는 게임과 보드 게임의 구분이 모호한 탓이었다. 보드 게임의 기억이 수십년 전에 머물러 있는 분들이 심사를 하셨으니 어쩔 수 없었다.이 시기에는 애니메이션 스타일을 가진 일명 서브컬쳐 게임이 트렌드였다. 하지만 오타쿠가 아닌 사람이 만든 게임에는 그 특유의 감성이 들어가 있지 않았고 게이머들은 이를 귀신같이 꿰뚫어 봤다. 그 덕분에 또 다른 형태의 일이 들어왔다. 이 몸은 나름 인증 받은 오타쿠 기획자가 아닌가. (내가 오타쿠다) 나의 강연 이후에 유명한 오타쿠 기획자나 디렉터들이 많아졌지만 대부분 회사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외부 업무를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20년 가까이 애니메이션 리뷰를 남기고 있는 블로그의 존재도 좋은 어필 포인트였다. 이를 토대로 여러 서브 컬쳐 게임에서 자문 활동을 했다. 공식적으로 하기도 했고 디렉터나 대표를 통해 뒤에서 조용히 진행하기도 했다. 캐릭터의 조형과 설정, 시나리오까지. 게임의 성패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콘텐츠에 오타쿠 감성을 불어 게임 넣는 것은 가능했다.게임 시나리오 자문을 하고 있던 중 모 출판 플랫폼에서 연락이 왔다. 게임 기획 책 때문일까? 아니면 웹 소설 때문에? 둘 다 아니었다. 체험형 시나리오가 필요하다는 요청이었다. 응? 이게 뭐지? 어떻게 알고 연락을 주셨는지 여쭈었다. 조라 대표님의 회사에 함께 다닌 동료와 절친이라고, 소개 받았다고 하셨다. 내용은 흥미로웠다. 최대 50명이 동시에 할 수 있어야 하며 최소 2명이서도 플레이가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플레이 할 때마다 내용이 달라져서 다회차를 하고 싶어야 한다. 그 조건에 맞춰서 시나리오를 써달라는 요청이었다. 말도 안된다는 생각과 동시에 도전 욕구가 샘 솟았다. 세상에 없는 게임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잔뜩 들떠서 일을 수락했다. 금액은 터무니 없을 정도로 적었지만,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 스터디 카페를 다니며 머리를 쥐어 뜯었다. 여러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결국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게임 기획을 해본 사람이 아니면 발상할 수 없는 시나리오라는 생각에 자부심마저 느꼈다.시나리오 완성 이후 프로젝트 제작 미팅에 참여했다. 알고 보니 대기업과 연관되어 진행되는 일이었고, 초 일류 성우들이 소집되었다. 그들이 내가 쓴 대본으로 녹음을 진행했다. 꿈 같은 일이었다. 대기업 직원들을 동원해서 내부 테스트도 진행했다. 평가가 썩 괜찮았다. 게임 이 콘텐츠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이 기다려 졌다. 하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는 않다. 현장 세팅만 남은 상황이었는데, 날짜가 자꾸 보류 되었다. 느낌이 왔다. 드랍인가? 공간 디자인과 소품 리스트까지 전부 전달한 상태였다. 진짜 한 걸음만 더 가면 되는데. 그리고 기사를 통해 이 프로젝트의 결말을 알게 되었다. 함께 진행하던 대기업이 다른 곳과 합병한다는 내용이었다. 게임을 개발하다보면 프로젝트가 드랍되는 것은 일상 다반사다. 하지만 이번 건은 타격이 컸다.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 낼 기회였는데. 아쉬웠다.이 글에 모두 담지는 못했지만, 정말 다양한 일을 했다. 세미나에서 발표를 하기 위해 정리해보니 2년간 한 일의 종류가 30가지가 넘었다. 그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시각 장애인을 위한 콘텐츠였다. 그들을 위한 점자 태블릿 기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하지만 이 플랫폼을 위한 콘텐츠는 턱 없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아주 한정적인 사람들만 쓰는 기기이고 여기에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돈이 되지 않을 테니까. 이번에도 비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런 멋진 일에 참가할 수 있다면 내가 돈을 내고라도 달라 붙고 싶었다. 작업을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편견을 깨달았다. 크다 작다 푸르다 예쁘다 같은 게임 시각적 표현을 당연한 듯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각 장애인 협회를 통해 수많은 리테이크를 당하면서 수없이 반성했다. 세상에는 우리의 생각이 닿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눈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그림책, 촉감으로만 진행할 수 있는 게임도 없지 않나. 이런 일들을 접해보면 다시 느끼게 된다. 돈보다 중요한 것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다양한 일을 하는 것은 즐겁다. 돈이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것이 더 많지만 상관없다. 나에게는 돈보다 중요한 것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새로운 것, 흥미로운 것, 의미 있는 것들 것 세상에 널려있다. 처음에는 일을 거절하면 비용을 높여서 다시 묻던 지인들도 이제 내 스타일을 알았나 보다. 그 일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어떤 가치를 주는 지로 설득을 한다. 아이러니한 사실이 있다. 이처럼 돈이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움직이고 있으니 오히려 수입이 훨씬 커졌다는 점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감사한 일이다. 이처럼 다양한 일을 진행하는 현재.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임은 분명하지만 종종 불안감이 올라온다. 이 일들이 모두 미래로 연결되는 것은 아닐 테니까. 많은 일들은 단발성이고 현재에만 의미가 있는 것들이니까. 앞으로 더욱 먼 미래까지, 평생 일을 하고 싶다. 이를 위해서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할지 게임 고민이 깊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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